모호한 경계의 시간들

도시의 빌딩 숲과 화려한 네온사인을 벗어나 고즈넉한 정취를 선사하는
제주는 때때로 단독으로 분리된 작은 나라 같은 이국적인 느낌을 준다.
쨍하니 해가 떴다가도 툭하고 빗줄기가 쏟아졌고 따뜻했다가도 금세 서늘해졌다.
봄과 여름 사이를 끊임없이 저울질하는 제주 덕분에 기분도 덩달아 오르내린다.
처음 보는 나라인 것처럼, 처음 앓는 계절인 것처럼 모든 것이 생경하다.
4월 어느 날, 갑자기 방문한 제주는 그러했다.

제주 애월 한담공원

걸어도, 걸어도

심신의 치유와 회복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지 모른다.
애월 한담공원의 절경을 한 눈에 담는 순간이면,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걱정과 근심으로 무거웠던 머릿속은 맑고 호젓한 정취를 즐기는 사이, 어느새 가벼워진다.
본격적인 산책로를 탐색하기에 앞서, 애월 한담공원 초입 주차장에
서는 탁 트인 해안 절경을 내려다볼 수 있다. 자동차나 스쿠터를 끌고
이곳에 방문한 관광객들은 마음까지 시원해지는 풍경에 저마다 일말의 탄성을 지른다. 그리고 이곳의 풍경을 배경 삼아, 한 장의 사진으로 추억을 쌓는다. 누군가의 간절한 소망이 담긴 돌탑 위에 또 다른 돌멩이를 얹는다.
주차장 한 편에, 경사진 짧은 길을 걸어 내려가면 굽이진 산책로가
펼쳐진다. 애월읍 한담마을에서 곽지 해수욕장까지 이어지는 약 1,2km 내외의 짧지 않은 거리다. 그러나 지루할 틈이 없다. 산책로
깊이 들어갈수록 가꾸지 않은 자연의 참맛을 느낄 수 있다.
저마다 이름표를 가진 바위의 모양새를 유심히 관찰해보는 것도 소소한 재미다. 자세히 보아야 비로소 눈에 보이는 이름 모를 들꽃과 수수한 풀 무더기도 한껏 낭만적인 느낌이다. 행여 지칠 땐 에메랄드 빛 바다를 바라본 채로 가만히 앉아있는 것도 좋다. 시간을 느리게 쓸 줄 아는 여유도 애월 한담공원에서는 필요하다.
파도의 기분 좋은 소음과 바람에 떠밀려오는 묵직한 바다 짠 내, 산책로 곳곳에서 반겨주는 생소한 이름의 식물과 바위. 그리고 바위 위에서 마주보고 선 채로 그물을 베며 일상을 보내는 제주 주민들까지.
애월 한담공원 산책로는 곳곳에 힘찬 생명력을 머금고 있다.
걸어도, 걸어도 새롭다. 제주만의 활력이 온몸을 감싼다.

뜻밖의 선물
걸음을 조금만 늦추면, 시야를 조금만 넓히면 일상에서는 쉬이 발견할 수 없었던 것들이 금세 포착되곤 한다. 제주 애월 한담공원에서는 사소하지만 특별한, 뜻밖의 선물들이 있다.
에메랄드빛 바다 가장 가까운 곳에는 바다의 산물인 거대한 바위와 둥근 돌멩이들이 자리 잡고 있다. 불규칙하게 늘어선 돌들의 조합은 마치 설치미술가가 정성스럽게 배치한 하나의 작품처럼 조화롭고
아름답다. 그 틈 사이로 끈질긴 생명력을 유지하는 수많은 야생초도 찾아볼 수 있다.
갯메꽃, 갯까치수영, 찔레, 망초, 도깨비고비, 사철쑥, 갯질경이, 강아지풀, 괭이밥, 갯장구채, 돈나무, 사철나무 등 그 종류도 다양하다.
봄의 절정인 5월엔 유채꽃이 만발하며, 여름의 초입인 6월엔 녹음의
절경이 아름답다고 하니 한담공원에서의 산책은 지루할 틈이 없다.
자연을 아끼고 즐길 줄 아는 제주 주민들의 한가로운 일상 또한 한담공원의 여유로운 정취를 더한다. 알록달록한 장난감을 펼쳐놓고 놀이에 빠진 어린 아이와 엄마의 밝은 미소. 물질을 마치고 뭍으로 나온 해녀의 젖은 발자국. 깊숙이 자리한 산책로 한 편에서 풀 더미를 정리하는 중년 여성들의 사근사근한 대화 소리. 교복 입은 중학생들의 활력 넘치는 웃음소리. 찰칵, 하는 셔터소리에 바위 위에서 그물을 자르던 장발의 중년 남성이 “잘 찍어 줘요”라며 수줍게 웃는다. 한 마디 말로 한 장의 사진으로는 다 담을 수 없는 제주의 아름다운 일상이다.

Writer 박주연 Photographer 민정연 Illustrator 권예원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